농경시대에 노인은 지혜의 대명사였다. 씨를 뿌리는 시기부터해서 추수할 때까지 노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동네 어른'를 찾아뵙고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자신이 경험한 지혜를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노인을 존경했다. 이런 추세는 첨단시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상당히 유효했다.
그러나 첨단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우선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첨단정보시대에는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의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당연히 노인의 지혜를 묻던 세대에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구하는 세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인터넷은 더 다양하고,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더 효율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당연히 노인의 지혜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정보와 존경의 대상이 아닌 '꼰대'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첨단 정보세상이다.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카카오톡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여 전 세계가 같은 정보, 같은 뉴스를 얻는 첨단 정보의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노인의 지혜는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정보를 인터넷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 정보가 최고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보만으로 밥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정보란 나만이 독차지할 때 유용가치를 지닐 수 있지만 지금 모든 정보는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보만으로 밥먹고 사는데 한계가 있다. 정보화시대에서 밥을 먹고 살려면 자신만의 콘텐츠(Content)가 필요하다. 정보는 있는데 콘텐츠가 없는 사람은 농경사회에서 자기의 밭과 논이 없는 소작농에 불과한 것이다.
목회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목회는 경험과 지혜라는 절대적 콘텐츠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정보는 얻을 수 있지만 경험과 지혜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목회적 콘텐츠는 목회적 경험과 지혜, 그리고 온갖 시행착오와 쓰라린 경험과 깨달음에서 얻게 된다.
이찬수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귀만 높아져서 자신이 그 정도로 설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보만 아는 어리석음이다. 유기성 목사를 보고 자신은 충분히 그 정도의 목회를 할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은 정보만 아는 행위이다. 눈에 보이는 정보가 다가 아니고, 귀에 들리는 정보가 다 콘텐츠가 아니다. 목회적 콘텐츠는 정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회적 콘텐츠가 필요한 이유는 사람을 상대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들은 결코 정보만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선배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눈물로 융합한 콘텐츠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Metacognition이다.
요즘 기독교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 누구냐?'라는 질문이 있다. 그 질문에 첫째는 신학생, 둘째는 전도사, 셋째는 부목사, 그리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 담임목사라고 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젊은이들은 더 이상 어른의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정보만으로 충분하다는 태도이다. 실제로 내 세미나에서도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는 친구들이 신학생과 전도사들이다. 담임목사가 배우라고 억지로 보냈다는 식이다. 그런 친구들에게 한 마디하고 싶은 게 있다. "애들아~ 니들 그렇게 하다가 한 방에 훅 간다"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이 동시에 보내버린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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