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로렌(Ralph Lauren). 패션업계에선 `폴로(Polo)` 브랜드를 일군 그를 `20세기 미국의 대표 디자이너`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가 상징하는 엘리트그룹, 서부의 프론티어 개척자들,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야구 선수의 유니폼등 다양한 미국인들의 삶에서 영감을 찾아낸 `폴로`는 그래서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생활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장 미국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낸 랄프 로렌은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약어. 북유럽에서 넘어온 미국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아직도 미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가 아니다. 1939년 뉴욕 브롱스의 평범한 유태인 집안에서 페인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유태교 성직자인 라바이(랍비)가 되길 원하는 어머니의 희망으로 유태인학교를 다닌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색상 감각 덕에 싼 옷도 맵시입게 입을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 그러나 나머지 학교생활은 그저 보통 학생에 불과했다. 고교 졸업앨범에 "훗날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희망을 써넣었던 그는 등록금 대기가 힘들어 학비가 비싸지도 않은 맨해튼의 시립대학(경영학)마저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장갑회사 점원으로 취직한 그는 곁눈질을 통해 디자인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색상 감각에 유태인 특유의 상상력을 가미한 랄프 로렌은 28살때인 1967년 2.5인치(약 6센티미터) 짜리 넥타이가 유행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4인치(10센티미터)의 폭이 넓은 넥타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시도등을 통해 그의 디자인은 `패션의 혁명`이란 평가를 받으며 승승 장구했다. 넥타이 성공직후인 68년 5만달러를 빌려 창업한 `폴로 랄프 로렌`은 이제 매출 2백40억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고급 의류회사로 자리매김을 했다.
의류업계에서는 `미국 최대 브랜드`만이 유태인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미국 최초 브랜드` 역시 유태인 몫이었다.
약 150년전인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를 지배한 단어는 `골드러시`였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황금 노다지를 찾아 서부 캘리포니아로 달려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처럼 한두해 사이에 갑자기 모여든 30만명이 만들어 놓은 도시이다. 하루아침에 서부의 뉴욕이 생겨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1850년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든 골드러시 인파에 끼었던 사람중 하나가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3년전인 1847년 18살의 나이로 독일에서 이민온 포목장사의 유태인 7남매중 막내였다. 뉴욕에 상점을 차린 형제들은 켄터키주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목을 팔았다. 리바이도 금을 캐러가 아니라 금캐는 광부들에게 포목을 팔러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리바이에게 광부들이 요청한 것은 포목보다 작업 바지였다. 직업상 두껍고 질긴 바지가 필요했던 탓이다. 선천적인 장사꾼이었던 그는 곧바로 바지 생산에 들어갔고 그의 바지는 광부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리바이스(Levi`s)`란 청바지 브랜드가 처음 나왔다. 미국 최초의 의류 브랜드인 `리바이스`는 최근 150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르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여생을 마친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유태인 사회의 대부였다. 유태인은 물론 비 유태인들에게도 자선활동을 많이 한 탓에 시 정부는 1902년 그가 죽자 장례식이 열리는 날을 공휴일로 선포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미국 의류산업의 `최초`와 `최대`만 유태인의 것이 아니다. 캘빈 클레인(Calvin Klein), 게스, 조다쉬, 앤 클레인, 도나 카란, DKNY, 토미 힐피저, 케네스 콜, 리즈 클레이본, 아버크롬비&피치, 빅토리아 시크릿, 존스 뉴욕, 나인웨스트등 수많은 유명 브랜드들이 유태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갭(GAP)의 창업주인 도날드 피셔도 유태인이고 니만마르쿠스 삭스피브스등 주요 백화점들의 패션 디렉터들도 대부분 유태인들이다.
이처럼 미국 유태인들이 의류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태인 박해로 동부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의 미국 이민이 봇물을 이뤘다. 이들 유태인 이민자들이 미국 이민의 창구였던 뉴욕에서 당시 한창 붐을 타기 시작한 의류산업의 노동력을 제공한 것. 1880년 이후에만 2백만명의 유태인이 집중적으로 뉴욕으로 넘어왔고 이들은 노동집약산업인 의류업계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유태인 노동자의 60% 이상이 의류업계에 종사했을 정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류회사의 경영도 대부분 유태인들이 맡았다. 1890년 경에는 뉴욕 의류공장의 95%를 유태인이 장악했다. 이 비율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20세기초까지 철강 석유와 함께 3대 산업으로 불리던 의류산업 종사자의 50-80%는 유태인 이었다.
유태인들의 의류산업을 주도하면서 새로 생긴 현상은 그 이전까지 `주문 및 가내 생산(Home-made)`위주였던 의류제품이 `레디 메이드(Ready-made)`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유태인인 윌리엄 및 이다 조젠탈 부부가 1923년 최초로 현대식 브래지어를 만들어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도 그런 흐름에서 창조된 `작품`으로 볼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류산업의 생산부문에서 유태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낮아져 갔다. 1920년대에는 50%선, 20세기 중반에는 30% 아래로 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창조적인 감각이 탁월한 유태인들은 생산분야보다 `돈이 되는`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맨해튼의 유명한 패션스쿨로 캘빈 클레인이 졸업한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유태인들의 자금으로 성장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볼수 있다.
미국 의류산업과 패션디자인의 역사는 곧바로 유태인의 미국 이민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그런 각도에서 보면 랄프 로렌을 필두로 하는 유태인 디자이너들의 성공도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