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을 천편일률적인 머리에서 해방시킨 사람은 단연 비달 사순(Vidal Sassoon)을 꼽을수 있다. `봅 스타일`로 상징되는 비달 사순의 커트머리는 여성들이 얼굴형태에 따라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가질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뛰어난 경영수단으로 `비달 사순`을 세계적인 헤어 브랜드로 만들었고 또 명성에 걸맞는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미적 감각을 가진 헤어드레서라는 화려한 겉모습에서는 결코 찾아볼수 없는 또다른 삶이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1928년 영국 런던 근교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비달 사순은 14살때부터 미용실에서 일을 배웠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런던의 공기는 `해방의 기운`보다는 `전후의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 틈새를 파시스트잔당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런던 뒷골목에서는 유태인들이 이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일부 유태인들이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전투경험이 있는 예비역 군인등 43명이 모여 `43그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몇몇 젊은 청년들이 가세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비달 사순. 어려서부터 유태인 차별에 몸서리를 쳤던 그는 43그룹의 가장 막내였지만 가장 용감하고 가장 과격하게 싸운 `거리의 전사`였다.
비달 사순은 나중에 폭력행사에 대해 "폭력 자체는 난센스이지만 어린이와 노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당시 밤에 싸우고 낮에 미용실에서 일한 그는 얼굴에 난 상처름 묻는 귀부인들에게 "밤에 헤어스타일을 연구하다 머리핀에 찔렸다"고 웃으며 받아넘기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비달 사순은 즉각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거기서 공부하고 정착하려고 했다. 그러나 런던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탓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돈을 벌었다. 후에 미국으로 귀화해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그가 은퇴이후 세운 것은 헤어연구센터가 아니었다.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류대학에 반유태즘과 인종박해를 연구하는 비달사순센터를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박해와 고난이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을까. `감각`을 창조적인 비즈니스로 연결시키는 것은 유태인들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능력중 하나로 평가된다. 비달 사순이 헤어스타일의 감각을 사업화 했다면 입맛의 감각을 활용해 세계적인 사업을 일군 사람들도 많다.
혀안에서 가장 감각적인 먹거리인 쵸콜릿. 중세시절이후 상류층의 전유물인 쵸콜릿을 대중화 시킨 밀튼 허쉬는 독일에서 펜실베니아로 이민온 유태인 가정에서 1857년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닌 학력이 전부이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업실패를 거친 뒤 오늘날 쵸콜렛의 대명사가 된 `허쉬 쵸콜렛`을 일궈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인쇄공장에 취직한 밀튼은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해 사탕공장으로 옮겼다. 18살의 나이에 필라델피아에서 사탕가게를 연 그는 콜로라도 덴버로 가서 카라멜공장을 차렸다. 이때 그가 깨달은 것이 좋은 우유를 사용해야 좋은 카라멜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낙농중심지인 데리 처치에 쵸코렛회사를 차렸다. 우유와 초코렛을 농축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품질 좋은 쵸콜렛을 대량생산할수 있게 되었고 1905년부터 허쉬 쵸콜렛이 쏟아져 나왔다. 허쉬 쵸콜렛이 유명해지면서 주정부는 마을 이름을 데리처치에서 아예 허쉬로 바꾸어주기도 했다.
그는 성공하면 성공의 결실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태인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기업경영으로 번 돈을 대부분 허쉬공장 직원들인 마을 주민들이 전기를 무료로 사용하고 학교는 물론 골프장까지 무료로 할수 있도록 해줬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허쉬 학교`에 남아있다.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무료로 다니는 이 학교는 아직도 허쉬 쵸콜릿의 주식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어 회사 경영이 좋으면 대부분의 이익이 학교재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달콤하고 감각적인 아침 식사를 제공한 던킨 도넛도 유태인의 작품. 1916년 보스턴 근교에서 태어난 윌리엄 로젠버그는 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10대 초반에 학교를 중퇴하고 식품배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안해본 일이 없는 그는 1950년 `브랜드`가 있는 도너츠를 개발했다. 1954년 `던킨 도넛`이란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지고 있던 점포는 5개. 이후 점포를 늘리며 미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영업기법을 개발해 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37개국에 5천개가 넘는 `던킨 도넛` 점포가 있을 정도. 그는 1960년 국제프렌차이즈연합이라는 조직은 직접 만들었는데 지금 회원수가 3만명에 달한다. 미국의 소매 영업중 프랜차이즈를 통한 판매가 50%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은 `프랜차이즈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공헌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고객이 보스이다`,`충분한 서비스라는 말은 없다`는 말로 고객중심 경영을 강조하는 그는 2백만달러이상을 호가하는 농장을 뉴햄프셔대학에 기증했고, 하바드의과대학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해 하바드의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많을 정도이다.
달콤한 감각을 비즈니스화한 유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겐 다즈`란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대중화시킨 매터스 류벤(Mattus Reuben). 그는 신선한 우유를 사용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낙농국가인 덴마크를 연상케 하는 브랜드를 만들어 하루아침에 아이스크림의 황제가 됐다. 94년 81세로 사망한 그는 말년에 아랍권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까지 알려진 이스라엘의 급진세력들을 지원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버몬트주의 어느 버려진 주유소에서 회사를 시작해 나중에 하겐다즈의 라이벌로 까지 성장한 아이스크림 업체인 `벤&제리`의 창업자인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 역시 아이스크림업계의 강자인 `바스킨&로빈슨스`의 창업자인 버튼 바스킨과 어빙 로빈슨스가 모두 유태인이라면 지나친 우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