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로스쿨(법과대학원)을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어디일까. 돈을 많이 버는 뉴욕 맨해튼의 유명 로펌(법률회사)들일까. 대부분의 변호사들에게는 맞는 답이다. 하지만 각 로스쿨의 ‘수석 졸업생’들에게는 틀린 답이다. 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대법원이다.
재판장의 말석에서 일을 도우는 서기에 불과하지만 대법원을 통해 법조계에 입문하는 것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엘리트 코스의 시작이다. 실제 대법원은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시카고등 이른바 ‘톱 5’ 또는 ‘톱 10’ 로스쿨에서 3등안에 든 학생중에서만 신입 직원을 뽑는다. 11-20위권 로스쿨의 경우에는 1등 졸업자에 한해 겨우 원서를 낼수 있을 정도이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이처럼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대법원의 채용기준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던 적이 있다. 지난 98년 12월 대법원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시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남미출신 이민자)들이 대부분 이었던 시위대의 주장은 대법원이 사람을 뽑을 때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실무를 맡는 법률 서기중 흑인은 1.7%이고 히스패닉(남미출신 이민자)이 1.2%에 불과한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인구비중이 각각 12-15% 선에 육박하고 있으니 인구비율로만 따지면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대법원 직원중에는 아시아계도 거의 없으며 대부분 백인들이다. 그러나 시위대들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대목이 하나 있다. 직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들중 30%이상은 인구가 미국 전체 국민의 2%에 불과한 유태인이라는 점이다. 같은 백인이라도 유태인이 아니면 숫자상의 ‘차별’을 당하긴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같은 비율은 미국 법조인들의 꿈인 ‘대법관’ 숫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체 9명의 대법관중 현재 유태인은 스테판 브레이어와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여) 두명.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22.2% 이다. 나머지 7명중에는 개신교가 4명, 가톨릭이 3명. 인구비례로 따지면 유태인들의 비중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유태인 대법관은 루이스 브랜다이즈가 1916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태인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후 1969년까지 유태인이 물러나면 후임으로 유태인이 임명하는게 관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69년 그런 관례가 깨졌고 그후 첫 대법관은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명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였다. 클린턴은 다음해 다시 스테판 브레이어를 임명해 사상 첫 2명의 유태인 대법관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통계적인 접근은 시간이 지날수록 법조계에서 유태인들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 유명 대학 로스쿨을 가보면 ‘최고 엘리트’들만 유태인이 아니다는 점을 금세 알수 있다. 전체 학생들의 평균 30%는 유태인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각 대학 로스쿨마다 JLSA(Jewish Law Students Association-유태인 법대생 연합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하버드법대에만 회원이 3백명이 넘는등 전국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쿨때부터 미국 법조계의 ‘주력부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명문 로스쿨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버클리 법과대학의 유진 볼로크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국 법과대학 교수의 26%가 유태인이라는 통계도 나와있다.
유태인 법학도들의 ‘우상’은 단연 사상 첫 유태인 대법관인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 1856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난 브랜다이즈는 어린시절 독일에서 공부한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877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노동운동과 여성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특히 근로자들의 최저임금과 반독점운동 같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무료변론도 마다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출마한 우드로 윌슨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윌슨은 당선후인 1916년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유태인 대법관’을 보는 주위의 눈은 곱지 않았다.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였는가 하면 제임스 맥레이놀드라는 동료 대법관은 임기를 마칠때까지 브랜다이즈 옆에 앉기를 거부했을 정도이다. 브랜다이즈는 임기중 인권과 언론자유를 위해 크게 노력했다. 그는 경제를 통제하기위한 정부의 개입을 적극 옹호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의 뉴딜정책도 적극 지원했다.
미국의 대법관이기에 앞서 유태인이었던 그는 1차대전이후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하는 시오니즘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유태인으로서 좋은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적극적인 시오니스트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을 남기도한 그는 미국 시오니스트들을 이끌고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등 윌슨 대통령이 시오니즘을 지원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39년 대법관직에서 은퇴했고 41년 사망했지만 그의 이름은 1948년 설립된 유태계 대학 ‘브랜다이즈 대학’의 이름으로 명명되면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물론 유태인 법률가들이 브랜다이즈 처럼 모두 인권을 중시하고 핍박받는 소수를 옹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비 유태인들이 느끼기에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변호사들도 수두룩하다. 미국 사회 일각에서 ‘유태인 변호사’라는 말은 자기이해만 챙기는 아주 이기적이고 냉혈한 법률가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남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와는 관계없이 실제 법률과 관련된 업무가 돌아가는 월가 로펌의 영향력있는 변호사들은 거의 유태인들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회사들이 전체 변호사의 절반 이상이 유태인 변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속 변호사 거의 대부분 유태인인 회사들도 한둘이 아니다.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이 경영하거나 유태자본으로 운영되는 탓에 이들이 법률문제를 유태인 변호사와 상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실제 복잡한 송사에 말렸을 경우 반드시 이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수임료가 비싸도 유태인 변호사를 써야 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하나의 불문율이다.
유태인들이 법조파워는 법조계의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대부분 유태인들은 아무리 일이 바빠도 유태인들이 지키는 명절에는 휴가를 내고 근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명절은 아예 회사차원에서 근무를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로펌이 몰려있는 맨해튼 전체가 유태인 공휴일은 휴일로 여길 정도이다.
유태인들이 이처럼 법률에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틴 스미스라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태인 변호사의 설명은 간단하다. “유태인들의 종교는 바로 법에 근원을 두고 있기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태인의 생존은 종교와 법에 의존하고 있다”며 “영토가 없었던 유태인을 지켜준 힘은 바로 종교와 이를 구성해주는 율법이었다”고 말한다. 유태민족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법은 이들에게 종교이자 생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유태종교는 ‘법’에서 시작됐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꼭 지켜야 할 구체적인 법인 10계명을 주었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인 10계명은 유태인들이 지키는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되었다. 통상 율법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율법학자들은 이를 613개의 율법으로 나눠 생활의 기본을 삼고 있다. 이중 ‘---을 하라’는 긍정적인 율법은 248개, ‘----을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율법이 365개로 유태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고 있다.
이처럼 종교와도 같은 개념인 율법을 중시한 유태인들은 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율법학자인 라바이(랍비)를 꼽고 있다. 법을 공부하는 라바이는 지금도 유태인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의 직업으로 가장 선호하는 직업중 하나이다. 법률을 중시여기는 유태인들 사이에서 법률가가 많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