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5일 실시된 미국 주지사 선거 결과가 발표됐을 때 모든 언론들의 관심은 하와이로 집중됐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50번째 주 하와이 섬. 여기서 여성 후보인 린다 링글(50)이 주지사로 당선된 것이다. 언론들은 관심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와이에 59년 주 승격이후 처음으로 공화당 주지사가 탄생했다는 점과 첫 하와이의 첫 여성 주지사라는 점이다. 이 두가지 기록만으로도 그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언론들이 드러내놓고 보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선에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가 더 들어있다. ‘매들린 쿠닌(1985-1991년 버몬트)에 이어 두번째 유태인 여성 주지사’, ‘하와이를 통치하는 최초의 유태인’, ‘에드워드 렌델 펜실베니아 주지사와 함께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두명의 유태인중 한명’이라는 유태인으로서의 기록들이다.
하와이는 유태인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시장으로 있는 뉴욕시나, 최근 소환투표 물러나 영화배우 출신 아놀드 슈워제너거에게 자리를 물려준 유태인 그레이 데이비스가 주지사로 있었던 캘리포니아주처럼 유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 아니다. 전체 인구 1백20만명중 유태인은 불과 1만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이런 악조건을 아는 탓에 주변에선 링글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링글은 자신의 주지사 당선을 “결코 기적이 아닌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한다. “유태인이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하와이의 다양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할수 있었고, 여러가지 다른 종교를 가진 주민들과의 연계에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배운다”며 “나의 정치적 리러십도 이런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나왔다”고 강조한다.
그는 여러 차례 “선거기간중 종교는 아무런 장애요인이 되지 않았다”, “유태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유태인으로서의 신념을 구현하기위해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 매일 아침 각료나 참모들과의 미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링글 주지사는 월요일 아침에만 종교지도자인 라바이(랍비)와의 만남이 가장 첫 행사라는 점이 다른 주지사들과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 유태인 주지사의 탄생은 1801년 조지아주 데이비드 엠마누엘이 처음이었다. 그후 드문드문 17명의 주지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링글이 뛰었던 지난해 가을 선거에서 유태인 입후보자는 무려 36명에 달했다. 유태인들이 정치참여가 예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태인 정치력 신장의 하일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지난 2000년 대통령선거 당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조셉 리버만 커네티컷주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한 일이다. 당시 미국 유태교의 정신적 지도자중 한명인 마빈 하이어 라바이는 이를 “인간의 달나라 착륙과 같은 정도의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개인의 종교적이고 인종적인 배경이 미국 정부의 정치적인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정치적인 타부’를 깨었다는 설명이다.
미국 최초의 ‘유태인 부통령 후보’에서 요즘은 ‘미국 최초의 유태인 대통령 후보’를 노리고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뛰고 있는 리버만은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정통교단(orthodox) 소속의 신앙심이 강한 유태인이다. “어린시절 신앙심이 깊은 할머니가 아직까지 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지금도 부인과 함께 유태교의 신앙생활과 가치를 구현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백년이상 미국의 경제 언론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온 유태인들이지만 불과 10-20년전 까지만 해도 이들에게 정치는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정치인들에게 돈을 대주는 역할은 많이 했지만 직접 정치에 뛰어 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이들이 최근들어 정치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일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뿌리깊었던 반(反) 유태주의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앨 고어가 리버만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자 각종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의 유권자들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0년대에는 이처럼 응답한 비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거에는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사람이 비일비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그렇지 않다는 점이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유태교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보수적인 종교인임을 강조하는 리버만은 그런 점에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물론 유태인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종교적인 신념이 유권자들의 눈에 결코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시대임에는 분명하다. 유태주의와 정치적인 삶이 균형을 이룰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사회에서 능력을 중시하는 엘리트주의, 이른바 ‘메리터크라시(Meritocracy) 문화’가 점점 확대되는 것도 유태인의 정치진출이 늘어나는 주요한 요인이다. 실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권 입문의 기회가 더 크게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대 선거가 돈과 미디어의선거라는 점이 유태인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버드등 명문대학 학생과 교수의 30-40%를 차지하는 유태인들의 고급 두뇌가 이미 쌓아 놓은 막대한 부와 결합되면서 생긴 힘이 유태인 네트워킹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유태인 미디어들을 통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또 70년대 베트남전 반대를 시작으로 민권운동의 확산, 환경보호주의등 좋은 명분이 강조되는 시대인 것도 이상주의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많은 유태인들을 정치영역으로 가게 만들고 있다. 리버만은 이 같은 현상을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히브류어로 설명한다. ‘세상을 개선시킨다(to improve the world)’는 뜻의 이 말은 “신이 시작한 창조를 인간이 완성하는 것은 유태인의 신성한 의무”라는 의미. 쉽게 말해 유태인들이 세상을 사는 이유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이는 정치부문에도 해당된다는 설명이다. 리버만은 “유태인들은 어려서부터 완벽한 세상을 구현하는데 도움을 줘야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고 강조하고 “정치가 꼭 유태인의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여기에 뛰어들어 ‘세상을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며 유태인의 정치참여가 자연스런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린다 링글 하와이 주지사의 ‘출사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수 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유태인들이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은 이스라엘만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이 미국 정치에 뛰어드는 것도 이스라엘을 더욱 확실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꼬집는다. 실제 최근 10-20년간 유태인들이 대거 미국 현실정치에 뛰어들면서 미국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이해와 이스라엘의 이해는 점점 더 일치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태인들이 지지해온 민주당은 물론 최근에는 공화당 정부에서 조차 이스라엘 지원 일변도의 정책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장관급’인 로버트 조엘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제외하곤 ‘유태인 장관’이 한명도 없는 현 부시 행정부에서 최고위 직급 유태인인 그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물러날 경우 후임 1순위로 꼽힐 정도로 부시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다. 역대 국방부 부장관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지난 2001년 9월 11일 WTC(세계무역센터) 테러직후 부시대통령에게 카불(아프가니스탄)을 건너뛰고 곧바로 바그다드(이라크)로 진격하자고 건의했을 정도의 강경론자이다. 여동생등 많은 가족들이 이스라엘국적을 갖고 아직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키신저(닉슨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와 매들린 알브레이트(클린턴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등 외교 국방을 다룬 역대 유태인 장관들의 뒤를 잇는 거물 관료로 통하지만 정책은 과거의 선배 관료들보다 훨씬 더 친 이스라엘 적이란 소릴 듣는다.
이제 유태인들이 ‘정치의 바다’로 대거 진출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보인다. 최근 유태인들 정치참여를 다룬 ‘미국 정치의 유태인(Jews in American Politics)’란 책의 작가인 샌디 마이젤은 “리버만 같은 사람들의 출현으로 미국의 젊은 유태인들이 점점 더 공직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이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은 ‘방문객이 아닌 주인(Hosts, Not Visitors)’으로 유태인들이 미국 정치권에 더욱 진출 할 것이란 낙관론을 펴고 있다. 유력지인 보스톤 글로브신문의 데이비드 쉬리브맨 워싱턴 지국장은 “앞으로 유태인들은 주체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모든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