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칼 마르크스(1818-1883)
역사의 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만약 그때 이랬었더라면…?”이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백가쟁명식 각양 각색의 논리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끝없는 논리대결만 이어질 뿐 해답없는 혼돈만 야기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상 ‘현재’는 만약(if)이란 가정이 용납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인 ‘과거’ 속에서 잉태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도들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만약’이란 단어를 가장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격다짐 격으로 한가지만 ‘가정’을 해보다. “만약 이 세상에 칼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대답들이 나올 것이다. “공산주의에 성공한 소련이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 이념 갈등의 산물인 지금 같은 남북대치상황도 없었을 것이다.”,”중국의 왕조시대가 아직도 이어졌을 것이다.”, “자본가(자본주의)의 횡포를 견제하지 못해 지구는 이미 황폐한 사회가 됐을 것이다.”…등등.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의 일을 대신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세상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상태였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오늘날의 현실세계에 마르크스가 미친 영향이 그만큼 막중한 탓이다. 마르크스의 존재 자체가 역사상의 대사건이라고 설명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역사상 이론적인 문제와 실제적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구성한 사상가로서 인류에게 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예술적으로 마르크스만큼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독일 트리에르(Trier)시에서 태어난 칼 마르스크의 할아버지는 유태교의 종교 지도자인 라바이(랍비)였고 아버지는 성공한 유태인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칼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 기독교 세례를 받게하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창시절에 베를린에 있는 가장 진보적인 청년 헤겔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지만 헤겔의 종교관에 반대하여 무신론자가 되었다.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가족들은 마르크스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런 예상은 적중하여 그의 가족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였으며 여섯명의 자녀 중에서 셋은 굶어 죽었다.
마르크스는 급진적 신문인 라인지의 편집자로 재직하였으나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신문은 폐간되었고,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파리와 벨기에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함께 작성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였으며, 그와 함께 작성한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 생전에 성공을 거둔 유일한 저작이 되었다. 이 소책자는 1847년 런던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동맹의 이론과 강령으로 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1849년에 런던으로 도피하고 그곳에서 혁명세력의 결집을 도우면서 한편으로는 대영박물관에서 경제사상사를 공부해가면 유명한 ‘자본론(Das Capital)’을 집필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상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발전과정의 법칙, 개인과 사회의 관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완전하고, 통합된 지적체계를 구성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지적체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때문에 전체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큰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유태인들이 같은 유태인인 마르크스를 보는 눈은 여러가지다. 유태교의 핵심인 메시아적인 사상을 갖고 인류의 해방을 꿈꾼 ‘위대한 사상가’란 시각에서부터 인류는 물론 유태인도 해방시키기 못한 ‘실패한 철학자’까지 극단을 달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유태인을 어려운 처지로 이끈 ‘배교한 유태인’이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유태교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성서에 나오는 천국을 이상향으로 믿었다고 생각한다. 유태인 선조들이 갖고 있었던 천국으로 인도하는 혁명 정신을 마르크스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모세의 이집트 탈출등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정의와 공정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사회질서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설파했었고, 마르크스도 이 같은 혁명 정신을 계승했다는 논리이다. 이 같은 논법을 적용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공산주의의 성서가 된다. 하지만 유태교와 마르크스 이론이 크게 다른 것은 마르크스가 이상향인 천국의 경내에서 신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노동자들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산주의는 상당기간동안 유태인들과 동일시 되었다. 한때 공산주의는 “세계 지배를 위한 유태인의 음모”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특히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 지도자중 한명인 레온 트로츠키(1880-1940)가 유태인이라는게 알려지면서 ‘공산주의=유태인’ 커넥션은 다시한번 세상을 들끓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유태인들에게 더없이 큰 피해를 주었다. 먼저 마르크스 자체가 유태인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첫번째 주요 에세이인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On The Jewish Question)’에서 유태인과 유대주의를 증오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봤다. 유태인 대학살의 주인공인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의 반 유태인 감정의 일부가 바로 이 에세이를 읽고 생겨났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러시아의 볼세비키 공산 혁명세력도 사회불만을 유태인에게 돌리며 대학살을 자행했다. 모스크바의 라바이들이 공산혁명 주역중 하나인 트로츠키를 찾아가 “유태인 학살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트로츠키는 “나는 유태인이기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자”라며 거절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유태인 학살에 앞장선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2인자가 되었지만 1인자인 레닌이 죽자 곧바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에서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추방했고 얼마 되지 않아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트로츠키의 죽음은 자식 세명을 굶겨죽여야 했던 마르크스의 운명과 함께 `마르크스=공산주의=유태인’ 사이의 묘한 상관 관계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번성했던 공산주의가 유태인을 죽였지만, 지금 공산주의는 사라졌고 마르크스의 사상과 유태인은 계속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정말이지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